표지판 없는 정약현 묘소… 군인들이 닦은 길 따라 남은 6·25의 흔적
팔당댐에 잠긴 백사장과 나룻배… 7대째 주민이 기억하는 마재마을
가톨릭교회가 주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청년 축제인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두고 남양주시 마재성지의 종교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최근 마재성지를 찾는 순례객들이 늘어나면서, 마재마을 투어의 일환으로 도보 10~15분 거리에 있는 정약현 선생의 묘소까지 발걸음을 넓히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2027년 WYD를 앞두고 흩어져 있는 4형제의 발자취를 잇고, 큰형 정약현 묘역을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정약용 선생의 형제들(큰형 정약현,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의 묘소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정약현의 묘는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인근 뒤산에 있고, 둘째 정약전은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하소마을 나주정씨 선영에, 셋째 정약종은 광주시 천진암 성지에 안장돼 있다. 정약용은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산 75-1에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합장돼 있다.
최근 마재성지를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정약현의 묘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약현은 한국 천주교 초기 신자인 이벽의 누이와 혼인했다. 처남인 이벽을 통해 동생들(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 천주교를 접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다.
본인은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자녀들과 사위들이 천주교 박해로 큰 화를 입었다. 그의 딸 정난주(마리아)와 결혼한 사위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의 전말과 백서(국외 군사 원조 요청)를 작성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딸 정난주는 제주도 노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바다이야기먹튀돈받기
다른 딸 정소사(1839년 기해박해)와 아들 홍봉주(1866년 병인박해) 역시 훗날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였다.
이에 경인일보는 정약현 묘가 있는 조안면 능내리를 찾아갔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역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 이곳에 평생을 살며 마을의 역사를 온몸으로 기억하는 이가 있다.
마재마을 정약현의 묘소 인근에서 7대째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 조영진(87)씨다. 그가 전하는 빛바랜 기억 속에는 분단과 전쟁의 상흔, 그리고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간 한강변의 아름다운 옛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표지판도 없는 길… 정약현 묘를 찾아가다
8일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묘소를 찾았다. 정약현의 묘는 다산 정약용 생가를 지나 감나무집 음식.으로 들어가기 전 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 30m가량 가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도 없다. 나무가 우거져 있어 울창해 보이지만 작은 동산이었다.
이날 찾은 정약현 묘는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원주민 조문식씨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 주변이 지금 보이는 수풀처럼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거칠어져서, 벌초하러 왔던 사람조차 손을 못 대고 그냥 내려갈 정도였다”며 “관리가 안 돼 있었다”고 말했다. 5년 전부터 누군가 벌초를 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깨끗해졌다고 했다.
현재 묘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뜻밖에도 군인들의 손으로 닦였다. 산 정상 부근에 군사 벙커가 들어서면서 군인들의 이동을 위해 길을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의 진입로가 되었다.
모바일 릴게임 바다이야기 고래
흥미로운 。은 인근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소가 남향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이 묘역은 서향이었다. 묘비에는 6·25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선명한 포탄 파편 흔적이 깊게 파여 있었다.
정약현 묘로 올라가는 길은 원래 주민들의 등산로였다. 산 정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두멍소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마을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여름철이면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천렵도 하던 곳이다. 그러나 댐이 생긴 이후 이곳이 물에 잠기면서 지금은 바위 절벽으로만 남아 있다.
조씨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마을 이야기라며 정약용 선생의 생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생가는 원래 현재의 여유당이 아니라 1925년 대홍수 때 집 전체가 완전히 떠내려가며 유실되었으며 현재 복원된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초가집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 포탄이 많이 떨어졌다. 의성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정씨 집안이 있었다. 그 집에는 책이 많이 있었는데 포탄에 맞아 불에 타고 많이 없어졌다. 특히 포탄에 맞아 책이 여기저기 길거리에 흩날렸고 이웃 주민들은 책을 주워다 뜯어서 벽지로 사용했었다고 말했다. 한편 다산유적지 내에 있는 여유당은 1986년에 고증을 거쳐 원래 집터와 가장 가까운 곳(유적지 안쪽 생가 터)에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내려오면서 길이 가팔라 등산화를 신고 있는데도 발이 쉽게 미끄러졌다. 가급적 등산화나 운동화 등 편한 신발을 착용하는 것이 좋다.
■ 한강 건너 분원리로 이어진 마재의 기억
길에서 만난 원주민 조문식(62) 씨는 정약현의 묘소 주변이 모두 사유지여서 길을 내거나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산주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릴게임신천지
최근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많이 찾아오면서 가끔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강 건너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재마을에서 한눈에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마재마을 주민들의 생활은 한강을 사이에 둔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었다. 조선 백자를 굽는 가마터로 유명한 분원리는 당시 강을 건너야 했던 이웃 마을이었다.
“우리 때만 해도 주민들이나 아이들이 강 건너 분원리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왕래가 정말 잦았죠. 그래서 두 마을을 오가는 나룻배가 쉼 없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특히 물이 빠지는 시기가 되면 넓은 한강은 거대한 놀이터이자 길이 되었다. 조씨는 “물이 빠지면 다 걸어서 건너 다녔다”며 “강가 주변이 온통 하얀 백사장과 자갈밭으로 가득해 정말 아름다웠다”고 눈을 반짝였다.
■팔당댐에 잠긴 풍경, 다시 잇는 역사길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은 한순간에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1974년 팔당댐이 최종 완공되면서 한강의 수위가 급격히 차올랐기 때문이다. 강물이 차오르면서 아이들이 뛰놀던 백사장과 자갈밭, 주민들의 이동을 책임졌던 나룻배도 모두 사라졌다.
7대째 마을을 지켜온 조영진 씨의 증언에는 분단과 전쟁, 팔당댐 건설을 거치며 달라진 한강 수계 지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편 교황청이 주관하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는 2027년 8월3일부터 8월8일까지 전 세계 150여 개국 약 40만 명의 청년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본대회 전 전국 각 교구에서 홈스테이와 지역 문화를 체험하는 교구대회를 거쳐 서울로 집결한다.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전국 15개 교구에서 교구대회가 열리며, 의정부교구에 속한 남양주시에서는 7월 30일 국내외 청년 및 교단 관계자 등 2천500여 명(홈스테이 1천700명, 공동숙박 920명 예상)이 남양주시를 방문할 것으로 전망이다.
군사 원조 요청)를